2026 설날 씨름을 끝까지 챙겨봤더니, 태안 모래판의 흐름이 보였다

얼마 전 설 연휴에 씨름 중계를 켜놓고 가족들 사이에서 혼자 기록표를 들여다봤는데, 2026 설날 씨름은 단순히 누가 이겼느냐보다 ‘어떤 방식으로 이겼느냐’가 훨씬 재미있는 대회였다. 위더스제약 2026 태안설날장사씨름대회는 2월 12일부터 18일까지 충남 태안종합실내체육관에서 열렸고, 남자 5개 체급과 여자 3개 체급, 여자부 단체전까지 이어졌다. 대한씨름협회 발표와 중계 흐름 기준으로 보면, 올해 설날 모래판은 신예의 첫 우승, 강자의 복귀, 장기 집권자의 독주가 한 대회 안에 다 들어 있었다.
태안에서 열린 7일, 체급마다 경기 색깔이 달랐다
설날장사씨름대회는 명절 스포츠답게 일정 자체가 촘촘했다. 12일 여자부 예선을 시작으로 13일 여자부 장사 결정전과 단체전, 14일 소백장사, 15일 태백장사, 16일 금강장사, 17일 한라장사, 18일 백두장사 순서로 흘렀다. 남자부 장사 결정전은 5전 3선승제라서 흐름 싸움이 길게 보였고, 여자부 결정전은 3전 2선승제라 초반 한 판의 무게가 더 컸다.
사실 씨름은 체급이 올라갈수록 단순히 힘 대 힘으로만 보이기 쉽다. 그런데 이번 대회는 오히려 체급별 특징이 선명했다. 소백과 금강에서는 0-2를 뒤집는 역전극이 나왔고, 태백과 한라, 백두에서는 초반 기세를 잡은 선수가 그대로 압박을 이어가는 장면이 많았다. 그래서 기록지만 보면 비슷한 3-0, 3-2라도 내용은 꽤 달랐다.
0-2에서 뒤집은 소백과 금강, 운영 싸움이 만든 반전
소백급에서는 구미시청 김남엽이 김덕일을 3-2로 꺾고 생애 첫 소백장사에 올랐다. 숫자만 봐도 짜릿하지만, 내용은 더 극적이었다. 첫판과 두 번째 판을 모두 들배지기로 내주며 0-2까지 밀렸다. 보통 5전 3선승제에서 이렇게 시작하면 경기장이 한쪽으로 기울었다고 느끼기 쉽다. 그런데 김남엽은 세 번째 판에서 들배지기 되치기로 흐름을 끊었고, 네 번째 판 들배지기로 균형을 맞춘 뒤, 다섯 번째 판 시작과 동시에 호미걸이를 성공시켰다.
금강급 김기수의 우승도 비슷한 구조였다. 수원특례시청 김기수는 울주군청 정종진에게 첫 두 판을 연달아 들배지기로 내줬다. 그런데 세 번째 판 밀어치기로 한 점을 따라가더니, 네 번째 판에서는 상대 밀어치기를 버틴 뒤 들배지기 되치기로 2-2를 만들었다. 마지막 판도 재경기 끝에 들배지기 되치기. 3-2 역전승이었다. 이 우승으로 김기수는 개인 통산 11번째 금강장사에 올랐고, 설날·단오·추석·천하장사 금강급 타이틀을 모두 가진 선수가 됐다. 이건 단순한 우승 하나보다 훨씬 큰 이력이다.
태백과 한라는 완성도 싸움이었다
태백급에서는 허선행이 이은수를 3-0으로 눌렀다. 허선행은 수원특례시청 소속으로 개인 통산 7번째 태백장사를 기록했다. 첫판 들어뒤집기, 두 번째 판 들배지기, 세 번째 판 다시 들어뒤집기. 기술 구성이 단조롭지 않았고, 상대가 타이밍을 읽기 전에 계속 다른 방향으로 압박했다. 특히 4강에서 허리 통증을 호소한 뒤에도 결승에서 흔들림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한라급에서는 울주군청 김무호가 차민수를 3-0으로 꺾고 개인 통산 10번째 한라장사에 올랐다. 지난해 설날 대회에서 박민교에게 밀렸던 기억이 있었는데, 올해는 완전히 다른 그림을 만들었다. 8강에서 오창록, 4강에서 박정의를 잡고 올라왔고, 결정전에서는 밀어치기와 들배지기로 세 판을 빠르게 가져갔다. 한라급은 힘과 속도의 경계에 있는 체급이라 한 번 균형이 무너지면 바로 판이 끝난다. 김무호는 그 경계를 가장 잘 이용했다.
백두급 김민재, 숫자가 이미 이야기가 됐다
대회 마지막 날 백두급은 역시 김민재였다. 영암군민속씨름단 김민재는 용인특례시청 김동현을 3-0으로 제압하며 백두장사에 올랐다. 지난해 설날 대회에 이어 2년 연속 정상이고, 백두장사 15회와 천하장사 3회를 더해 개인 통산 18번째 장사 타이틀이다. 첫판과 두 번째 판 모두 밀어치기, 세 번째 판도 밀어치기로 끝냈다는 점이 상징적이다. 상대가 알고도 막기 어려운 기술이 있다는 건, 이미 기량 차이가 기록으로 설명되는 단계라는 뜻이다.
김민재의 올해 목표가 백두장사 20회라는 말도 그냥 인터뷰용 문장이 아니다. 현재 페이스를 보면 목표 자체가 현실적인 숫자로 들린다. 물론 백두급은 한 번의 부상, 한 번의 대진 변수로 판도가 바뀌는 체급이다. 그래도 설날 무대에서 보여준 압박감은 확실했다.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선수가 아니라, 상대가 버티는 방향을 읽고 그다음 중심을 무너뜨리는 선수에 가까웠다.
여자부와 팀 흐름까지 보면 더 입체적이다
여자부도 그냥 지나치기 아까웠다. 매화급에서는 거제시청 이연우가 김채오를 2-0으로 이기며 통산 8번째 매화장사를 차지했다. 국화급에서는 안산시청 이유나가 이세미를 2-0으로 꺾고 생애 첫 국화장사에 올랐다. 무궁화급에서는 거제시청 김하윤이 박민지에게 첫판을 내준 뒤 2-1로 뒤집으며 통산 8번째 장사 타이틀을 가져갔다.
단체전에서는 안산시청이 괴산군청을 4-2로 꺾었다. 개인전에서 이유나가 첫 장사에 오르고, 팀은 단체전까지 가져갔다. 이런 결과는 팀 훈련 분위기와 선수층을 같이 보여준다. 씨름은 개인 종목처럼 보이지만, 실제 대회 흐름에서는 소속팀의 준비 상태가 꽤 크게 드러난다.
- 소백장사: 김남엽, 김덕일에 3-2 역전승
- 태백장사: 허선행, 이은수에 3-0 승리
- 금강장사: 김기수, 정종진에 3-2 역전승
- 한라장사: 김무호, 차민수에 3-0 승리
- 백두장사: 김민재, 김동현에 3-0 승리
- 여자부 장사: 이연우, 이유나, 김하윤
- 여자부 단체전: 안산시청 우승
2026 설날 씨름을 기록으로 따라가 보니, 올해 민속씨름의 초반 판도는 꽤 흥미롭게 열렸다. 김남엽과 이유나처럼 새 이름이 올라왔고, 허선행과 김기수처럼 자기 체급의 무게를 다시 증명한 선수도 있었다. 그리고 김민재는 이제 한 대회 우승자가 아니라, 백두급 기록의 기준선 자체를 바꾸는 선수처럼 보인다. 설날에 잠깐 보는 스포츠라고 넘기기엔, 모래판 위 숫자들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