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애덤 올러가 22년 만에 선동열을 소환한 밤, 숫자 뒤를 따라가봤더니

얼마 전 광주 KT전을 보다가 5회쯤부터 화면의 공기 자체가 달라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KIA 애덤 올러가 단순히 잘 던지는 수준을 넘어, 타자 한 명 한 명을 지워가며 오래된 기록장을 다시 펼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2026년 9월 4일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 올러의 최종 기록은 6.2이닝 3피안타 3볼넷 10탈삼진 2실점이었습니다. 숫자만 놓고 보면 훌륭한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급 투구입니다. 그런데 이 경기의 진짜 맛은 10탈삼진이라는 총량보다, 그 삼진이 누구에게 어떻게 분포됐느냐에 있었습니다.
5회 만에 선발 타자 전원 탈삼진, 그래서 선동열 이름이 나왔다
올러는 5회초 허경민을 삼진으로 잡아내면서 KT 선발 타자 9명을 모두 한 번 이상 삼진 처리했습니다. 이른바 선발 타자 전원 탈삼진입니다. KBO 전체로는 역대 46번째, KIA 구단으로는 역대 7번째 기록이었습니다. 더 흥미로운 건 타이거즈 유니폼 기준으로 2004년 10월 5일 이동현 이후 22년 만에 나온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소환된 이름이 선동열입니다. 타이거즈 역사에서 이 기록을 남긴 투수는 선동열 3회, 이대진 2회, 이동현 1회, 그리고 올러입니다. 그냥 ‘삼진 많이 잡았다’가 아니라, 타이거즈의 투수 계보 안에 이름을 걸어둔 밤이었습니다. 외국인 투수가 이 흐름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도 꽤 상징적입니다.
- 경기: 2026년 9월 4일 광주 KT전
- 올러 기록: 6.2이닝 3피안타 3볼넷 10탈삼진 2실점
- 특이 기록: 5회 만에 KT 선발 타자 전원 탈삼진
- KIA 기준: 구단 역대 7번째, 22년 만의 기록
초반 흐름은 거의 완벽했다
사실 이 경기 초반 올러는 ‘좋다’보다 ‘건드리기 어렵다’에 가까웠습니다. 4회까지는 퍼펙트 흐름이었고, 5회 2사 뒤 장진혁에게 볼넷을 내주기 전까지 단 한 명도 출루시키지 않았습니다. 6회 2사에서 최원준에게 첫 안타를 맞기 전까지 노히트 분위기도 이어졌습니다.
삼진 페이스도 무서웠습니다. 1회 최원준, 2회 중심 타선, 3회 하위 타순을 줄줄이 돌려세웠고 5회까지 삼진 9개를 쌓았습니다. KT 타선이 2026시즌 상위권 경쟁을 이끄는 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 값집니다. 약한 라인업을 상대로 쌓은 기록이 아니었습니다.
이날 투구 구성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보도된 투구 수 기준으로 올러는 포심 패스트볼 53구, 슬라이더 34구, 체인지업 9구, 커브 8구를 던졌습니다. 총 104구 중 스트라이크가 67개였습니다. 스트라이크 비율만 보면 무작정 존에 꽂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 내용은 달랐습니다. 초반에는 빠른 공으로 카운트를 잡고, 불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으로 배트를 끌어냈습니다.
기록은 화려했지만, 승리 투수는 되지 못했다
야구가 잔인한 종목이라는 말은 이런 날 더 와닿습니다. 올러는 6회까지 사실상 경기를 지배했지만, 7회 2사 이후 급격히 흔들렸습니다. 허경민에게 안타를 맞고, 장진혁과 김민혁에게 볼넷을 내주며 만루가 됐습니다. 이어 김상수에게 적시타를 허용하면서 2실점, 0-2로 뒤진 상황에서 마운드를 내려왔습니다.
투수 입장에서는 정말 아까운 장면입니다. 7회까지 막았다면 경기의 인상은 더 압도적으로 남았을 겁니다. 하지만 104구째로 향하는 구간에서 구위와 제구의 균형이 조금씩 흔들린 것도 사실입니다. 완벽에 가까웠던 6회까지와 달리, 7회에는 타자들이 공을 조금 더 오래 보고 버티기 시작했습니다. KT 같은 팀은 그런 작은 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도 KIA는 이 경기를 결국 연장 10회 변우혁의 끝내기 희생플라이로 4-3 승리했습니다. 올러에게 승리가 붙지는 않았지만, 경기의 바닥을 받친 사람은 분명 올러였습니다. 선발이 초반부터 무너지지 않고 6이닝 이상을 버텨주면, 타선은 늦게라도 다시 숨을 쉴 시간을 얻습니다. 이 경기가 딱 그랬습니다.
2026년 KIA에서 올러가 갖는 무게
올러의 시즌 흐름을 같이 보면 이 기록은 더 입체적으로 보입니다. 4월 24일 롯데전에서는 9이닝 3피안타 2볼넷 11탈삼진 완봉승을 거뒀습니다. KIA 외국인 투수의 정규이닝 완봉승으로는 10년 만의 장면이었습니다. 8월 11일 삼성전에서는 6이닝 1실점으로 시즌 10승을 찍으며 다승 경쟁권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물론 시즌 내내 매끈하지만은 않았습니다. 7월 28일 대구 삼성전에서는 1이닝 8실점으로 크게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좋은 선발의 기준은 무너지지 않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무너진 뒤 로테이션 안에서 다시 자기 공을 되찾는 능력이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올러는 8월 이후 다시 연속 퀄리티 스타트 흐름을 만들었고, 9월 KT전에서 선발 타자 전원 탈삼진이라는 강한 장면을 찍었습니다.
5일 경기 전 기준으로 KIA는 선두 KT와 6.5경기 차, 5위 두산과 3.5경기 차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김도영 등 일부 핵심 자원이 아시안게임 대표팀 일정으로 약 2주간 빠질 예정이라는 변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구간에서 믿을 수 있는 선발은 단순한 1승 카드가 아닙니다. 연패를 끊고, 불펜 소모를 줄이고, 더그아웃의 불안감을 낮추는 장치입니다.
선동열을 떠올리게 한 건 이름값이 아니라 방식이었다
선동열이라는 이름은 너무 크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뤄야 합니다. 올러가 선동열과 같은 투수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날만큼은 타자를 압도하는 방식, 순서를 가리지 않고 삼진을 쌓는 장면, 그리고 타이거즈 기록표에서 22년 전으로 시간을 당기는 힘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경기가 스포츠 기록의 재미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10탈삼진은 박스스코어에 남고, 선발 타자 전원 탈삼진은 기록집에 남습니다. 하지만 팬의 기억에는 4회까지 아무도 1루를 밟지 못하던 긴장감, 5회에 완성된 진기록, 7회 2사 이후 갑자기 흔들린 숨소리까지 같이 남습니다.
올러의 9월 4일 KT전은 완벽한 승리 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야구답습니다. 선동열의 이름이 다시 불린 밤, KIA는 외국인 에이스 한 명이 팀의 가을 계산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 꽤 선명한 힌트를 얻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