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이 김도영을 어나더 레벨이라 부른 날, 숫자를 다시 보니 더 무서웠다

얼마 전 이승엽 코치가 김도영을 두고 “어나더 레벨”이라고 표현한 장면을 보고, 솔직히 고개가 먼저 끄덕여졌습니다. 그냥 잘 친다는 칭찬이 아니라, 타석에 들어섰을 때 경기의 공기를 바꾸는 선수에게 붙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스포츠 팬 입장에서는 이런 표현이 나왔을 때 감정만 따라가면 아쉽죠. 숫자를 같이 보면 그 말이 왜 나왔는지 훨씬 선명해집니다.
국민타자의 극찬이 가볍지 않은 이유
이승엽이라는 이름은 KBO에서 장타를 말할 때 거의 기준점처럼 쓰입니다. 통산 467홈런, 1498타점, 2156안타를 남긴 타자가 누군가의 배트 스피드와 장타력을 보고 “다른 레벨”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단순한 덕담과는 결이 다릅니다. OSEN 보도에서 이승엽 코치는 김도영의 배트 스피드가 뛰어나고, 두산 감독 시절에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타자였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이종범과의 비교였습니다. 이종범은 타석에 서는 것만으로 무언가 만들 것 같은 기대감을 주던 선수였고, 김도영도 그런 유형이라는 평가였죠. 그런데 여기에 “장타력은 더 좋다”는 말이 붙었습니다. 이건 꽤 센 표현입니다. 이종범의 상징성이 주루와 컨택, 경기 지배력에 있었다면 김도영은 거기에 홈런 생산력까지 얹은 형태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38홈런 시점에서 이미 보였던 폭발력
이 발언이 나온 2026년 8월 24일 기준, 김도영은 112경기에서 타율 0.301, 38홈런, 94타점, 95득점, OPS 1.036을 기록 중이었습니다. 숫자만 놓고 봐도 리그 최상위권인데, 더 무서운 건 그 숫자가 ‘완성형 베테랑’이 아니라 아직 성장 구간에 있는 선수에게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2024년 김도영은 타율 0.347, 38홈런, 109타점, 143득점, 40도루로 MVP급 시즌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이미 30홈런-30도루, 폭발적인 득점 생산, 장타와 주루를 동시에 보여줬죠. 그런데 2026년에는 도루 숫자보다 장타 쪽으로 무게가 더 실리며 또 다른 버전의 김도영이 등장했습니다. 같은 선수인데 시즌의 색깔이 달라졌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 2024년: 타율과 주루, 득점 생산까지 넓게 터진 시즌
- 2026년 8월 말: 홈런왕 경쟁과 40홈런 도전이 중심이 된 시즌
- 공통점: 단순 출루형 선수가 아니라 경기 흐름을 한 번에 바꾸는 타자
이승엽 기록에 다가섰고, 일부는 넘어섰다
김도영은 2026년 9월 8일 삼성전에서 시즌 40호 홈런을 터뜨렸습니다. 이승엽이 갖고 있던 최연소 시즌 40홈런 기록 자체는 아깝게 놓쳤지만, KIA 국내 타자 최초의 40홈런이라는 굵직한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기록 경신에 실패한 날조차, 김도영의 시즌은 실패로 읽히지 않았습니다. 이미 구단 역사 안에서는 새 페이지를 열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9월 13일 한화전에서는 40홈런-100타점-100득점을 완성했습니다. KBO 발표 기준으로 22세 11개월 11일, 역대 최연소 기록이었습니다. 이승엽이 1999년에 세웠던 40홈런-100타점-100득점 최연소 기록을 27년 만에 갈아치운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승엽의 칭찬은 단순한 예감이 아니라, 이후 기록으로도 이어진 셈입니다.
김도영의 무서움은 숫자보다 선택지에 있다
김도영을 상대하는 투수 입장에서 가장 까다로운 지점은 하나만 막으면 되는 타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강하게 붙으면 장타가 나오고, 조심스럽게 들어가면 카운트 싸움이 꼬입니다. 빠른 공에 밀리지 않는 배트 스피드가 있고, 실투를 놓치지 않는 힘도 있습니다. 여기에 주루 능력과 스타성까지 있으니, 한 타석이 경기 전체의 분위기를 흔드는 순간으로 커집니다.
사실 팬들이 “어나더 레벨”이라는 말을 쉽게 쓰는 시대가 됐지만, 선수에게 진짜로 붙이려면 조건이 꽤 까다롭습니다. 리그 평균을 압도해야 하고, 동세대 선수들과 비교해도 다른 무기가 보여야 하며, 무엇보다 상대 벤치가 경기 운영을 바꾸게 만들어야 합니다. 김도영은 지금 그 기준에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아니, 일부 영역에서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이 비교가 더 재미있는 건 아직 진행 중이라서
이승엽과 김도영을 같은 선 위에 놓는 건 조심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승엽은 긴 시간으로 증명한 전설이고, 김도영은 지금 자신의 시대를 만들어가는 선수입니다. 다만 비교가 의미 있는 이유는 둘 다 리그의 기준을 바꾸는 타자라는 점에 있습니다. 이승엽이 홈런의 스케일을 바꿨다면, 김도영은 장타와 운동능력, 스타성을 한 몸에 묶는 방식으로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승엽의 “어나더 레벨”이라는 말은 칭찬이면서 동시에 관전 포인트입니다. 김도영이 지금 보여주는 숫자는 이미 대단하지만, 더 재미있는 건 이 선수가 아직 자신의 최종 형태에 도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기록은 지나간 경기의 흔적이지만, 김도영의 기록은 자꾸 다음 장면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그게 요즘 김도영을 보는 가장 큰 재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