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아 올림픽 데뷔를 다시 봤더니, 일본 열광은 점수보다 먼저 반응했다

처음 본 순간, 점수표보다 분위기가 먼저 움직였다
얼마 전 밀라노·코르티나 올림픽 여자 피겨를 다시 훑어봤는데, 신지아의 이름이 숫자 이상으로 오래 남았다. 보통 올림픽 데뷔전은 결과표 한 줄로 지나가기 쉽다. 그런데 신지아는 달랐다. 단체전 여자 쇼트에서 68.80점을 받고 10명 중 4위에 올랐고, 개인전에서는 쇼트 65.66점, 프리 141.02점, 총점 206.68점으로 11위를 기록했다. 메달권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응은 메달권 선수 못지않게 뜨거웠다.
특히 일본 쪽 분위기가 흥미로웠다. 일본은 여자 싱글에서 나카이 아미, 사카모토 가오리 등 강력한 선수들이 상위권을 장악한 대회였다. 자국 선수만 봐도 이야기할 거리가 넘쳤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 한국의 17세 스케이터 신지아에게 시선이 꽤 많이 갔다. 스포니치와 더 다이제스트 등 일본 매체는 온라인 반응을 전하면서 ‘김연아를 떠올리게 한다’, ‘아름답다’, ‘부드럽고 섬세하다’는 반응을 소개했다. 단순한 호감 이상의 신호였다.
왜 일본 팬들이 신지아에게 빨리 반응했을까
사실 일본 피겨 팬들은 눈이 높은 편이다. 자국 리그처럼 선수층이 두껍고, 주니어부터 시니어까지 경기 보는 문화가 촘촘하다. 그런 팬들이 낯선 선수를 볼 때 가장 먼저 보는 건 점프 성공 여부만이 아니다. 스케이팅의 질, 프로그램의 흐름, 음악을 타는 방식, 랜딩 뒤의 자세까지 본다. 신지아가 눈에 들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지아는 폭발력으로 링크를 밀어붙이는 타입이라기보다, 선이 길고 차분하게 흐르는 타입이다. 쇼팽의 녹턴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이런 장점이 더 잘 보인다. 점프를 뛰고 끝나는 게 아니라, 점프 전후의 움직임이 프로그램 안에 묻힌다. 그래서 화면으로 봐도 ‘끊겼다’는 느낌보다 ‘이어졌다’는 느낌이 강하다. 일본 팬들이 ‘왕도 여자 피겨’라는 식으로 반응한 것도 이 지점과 닿아 있다.
- 단체전 쇼트: 68.80점, 여자 싱글 4위
- 개인전 쇼트: 65.66점, 14위로 프리 진출
- 개인전 프리: 141.02점, 개인 최고점
- 개인전 총점: 206.68점, 최종 11위
숫자로 보면 더 선명한 올림픽 데뷔의 무게
신지아의 개인전은 완벽한 경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쇼트에서는 콤비네이션 점프에서 흔들렸고, 프리에서도 트리플 루프 착지가 매끄럽지 않았다. 그런데 프리에서 141.02점을 받았다는 게 중요하다. 올림픽 첫 개인전 프리에서 개인 최고점을 냈다는 건, 큰 무대의 압박을 완전히 이겨냈다는 뜻은 아니어도 최소한 무너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총점 206.68점은 시즌 최고점에 1.77점 모자란 기록으로 알려졌다. 이 차이는 꽤 상징적이다. 올림픽이라는 환경, 첫 출전, 개인전 쇼트의 아쉬움까지 감안하면 신지아는 자기 평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어린 선수에게 가장 위험한 건 실수 하나 뒤에 프로그램 전체가 흐트러지는 장면인데, 프리에서는 초반의 아쉬움을 뒤로 두고 끝까지 끌고 갔다. 마지막에 주먹을 살짝 쥔 반응도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과장된 세리머니가 아니라, 버텨낸 선수의 표정에 가까웠다.
김연아 이후라는 말의 부담과 가치
한국 여자 피겨 선수에게 ‘김연아 이후’라는 표현은 늘 무겁다. 듣기에는 화려하지만, 사실 선수 개인에게는 비교의 그림자가 될 수 있다. 신지아도 세계주니어선수권에서 2022년부터 4년 연속 은메달을 따며 기대를 키웠고, 자연스럽게 그런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런데 이번 올림픽 데뷔에서 확인된 건 ‘누구의 다음’이라기보다 ‘신지아가 어떤 방식으로 경기를 풀어가는 선수인가’였다.
점프 구성만 놓고 보면 여자 싱글의 흐름은 점점 더 공격적이다. 트리플 악셀, 고난도 콤비네이션, 빠른 회전축이 상위권의 언어가 됐다. 신지아 역시 앞으로 더 높은 기술 요소가 필요하다. 연합뉴스 인터뷰에서도 트리플 악셀 같은 더 어려운 요소를 프로그램에 넣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근데 기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신지아의 장점은 프로그램의 결을 해치지 않는 수행력이다. 이건 어린 선수에게 꽤 귀한 자산이다.
일본의 열광은 외모 이슈만으로 보면 놓치는 게 많다
일본 매체들이 온라인 반응을 전하면서 외모와 분위기에 대한 언급도 많았다. ‘아이돌 같다’, ‘얼음 요정 같다’는 식의 말이 퍼진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이런 반응은 스포츠 기사에서 자주 소비되지만, 거기서 멈추면 신지아의 데뷔를 너무 얕게 보는 셈이다. 팬들이 오래 반응한 건 결국 연기 자체가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다.
피겨는 점수 스포츠이면서 동시에 인상 스포츠다. 심판은 회전수와 에지, 수행등급을 보고 점수를 매기지만, 팬은 장면을 기억한다. 신지아의 프리는 3회전 루프 실수가 있었는데도 ‘아름다웠다’는 반응이 남았다. 이건 프로그램 전체의 인상이 한 번의 실수를 덮을 만큼 안정적이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프리 141점대는 데뷔 올림픽에서 가볍게 나올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다음 4년을 보게 만든 데뷔전
신지아의 첫 올림픽은 11위라는 순위보다, 206.68점이라는 총점보다, ‘다음이 궁금한 선수’라는 인상을 남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단체전에서 먼저 분위기를 익히고, 개인전 쇼트에서 흔들리고, 프리에서 개인 최고점을 찍는 흐름은 꽤 스포츠답다. 처음부터 완성형으로 등장한 드라마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볼 맛이 있었다.
일본 팬들의 반응도 그냥 이웃 나라 유망주를 신기하게 본 정도는 아니었다. 피겨를 오래 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클래식한 선, 안정적인 기본기, 무대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 태도가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신지아가 고난도 점프를 얼마나 장착하느냐에 따라 상위권 경쟁의 색깔은 달라질 수 있다. 그래도 이번 올림픽 데뷔 하나만 놓고 보면, 그녀는 이미 국제 무대에 자기 이름을 꽤 또렷하게 남겼다. 다음 시즌에 점수표를 볼 때 신지아의 이름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