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에서 38번 넘겨본 LG 라모스 시즌의 진짜 맛

얼마 전 LG의 외국인 타자 계보를 다시 훑다가, 2020년 로베르토 라모스 기록에서 손이 멈췄습니다. 38홈런. 숫자만 보면 그냥 거포 외국인 타자의 강한 한 시즌처럼 보이는데, 이 기록은 LG 팬들에게 꽤 묘한 감정을 남긴 시즌이었죠.
왜냐하면 LG는 전통적으로 홈런으로 리그를 찍어누르는 팀 이미지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습니다. 특히 잠실을 홈으로 쓰는 팀이라는 조건까지 붙으면, 30홈런도 쉽게 말하기 어려운 숫자였습니다. 그런데 라모스는 그 벽을 한 번에 38개까지 밀어 올렸습니다.
38홈런이 더 크게 보였던 이유
라모스의 2020시즌 성적은 117경기, 타율 0.278, 출루율 0.362, 장타율 0.592, OPS 0.954였습니다. 홈런은 38개, 타점은 86개였고 안타 120개 중 장타가 차지하는 존재감이 꽤 컸습니다. 단순히 많이 친 정도가 아니라, 맞는 순간 경기 흐름을 바꾸는 타구가 많았습니다.
특히 이 38홈런은 LG 구단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었습니다. 이전 기록은 1999년 이병규의 30홈런이었고, 라모스는 그 기록을 21년 만에 8개나 더 끌어올렸습니다. 30개와 38개는 느낌이 다릅니다. 30개는 팀 역사에 남는 거포 시즌이고, 38개는 리그 홈런왕 경쟁권에 실제로 들어간 숫자입니다.
- 2020시즌 홈런 38개
- 리그 홈런 2위
- LG 한 시즌 최다 홈런
- 장타율 0.592
- OPS 0.954
로하스가 없었다면 더 뜨거웠을 시즌
그해 홈런왕은 KT의 멜 로하스 주니어였습니다. 로하스는 47홈런을 때렸고, 라모스는 38홈런으로 2위였습니다. 9개 차이였으니 작다고 할 수는 없지만, LG 타자가 홈런 부문 2위에 오른 장면 자체가 꽤 낯설었습니다.
2020년 홈런 상위권을 보면 라모스의 위치가 더 선명합니다. 로하스 47개, 라모스 38개, 나성범 34개, 최정과 양의지가 33개. 이름값만 봐도 리그를 대표하는 장타자들이 줄줄이 서 있던 시즌입니다. 그 사이에서 라모스가 2위에 있었다는 건, 단순한 반짝이 아니라 리그 전체 기준에서도 확실한 파워였다는 뜻입니다.
재미있는 건 라모스의 홈런 페이스입니다. 5월에 10홈런으로 출발했고, 6월에는 3개로 꺾였습니다. 상대 배터리가 본격적으로 약점을 파고들기 시작한 구간이었죠. 그런데 7월 6개, 8월 10개, 9월 9개로 다시 올라왔습니다. 한 달만 뜨겁고 사라진 타자가 아니라, 조정받고도 다시 장타를 만든 타자였습니다.
잠실이라는 배경을 빼면 이야기가 덜해진다
라모스의 38홈런을 말할 때 잠실을 빼면 맛이 반쯤 빠집니다. 잠실은 KBO에서도 홈런 생산이 쉬운 구장이 아닙니다. 좌우중간이 깊고, 외야가 넓습니다. 제대로 띄웠다고 느낀 타구도 워닝트랙에서 잡히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 곳입니다.
그런데 라모스는 그 구장을 홈으로 쓰면서 장타율 0.592를 찍었습니다. 홈런당 타석 수로 보면 약 13타석마다 하나씩 넘긴 셈입니다. 이건 거포의 리듬입니다. 매 경기 홈런을 기대하게 만드는 타입이었고, 실제로 라모스가 타석에 들어서면 투수도 카운트를 쉽게 잡으러 들어가기 어려웠습니다.
타구 질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당시 알려진 평균 홈런 비거리는 121m대였습니다. 그냥 담장을 살짝 넘기는 타구만 있었던 게 아니라, 맞는 순간 외야수가 고개를 돌리는 타구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팬들이 라모스에게 강하게 반응했습니다. LG 타선에서 오랫동안 갈증처럼 남아 있던 왼손 거포의 그림이 잠깐 현실처럼 보였거든요.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숫자들
물론 38홈런 시즌이 완벽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라모스는 삼진도 136개로 많았습니다. 볼넷 55개를 얻어내며 출루 능력을 어느 정도 보여줬지만, 콘택트 안정성에서는 분명 출렁임이 있었습니다. 타율 0.278은 나쁘지 않았지만, 상대가 코스를 좁히고 변화구 비중을 높일 때 헛스윙이 늘어나는 장면도 꽤 보였습니다.
홈런의 구성도 흥미롭습니다. 38개 중 솔로 홈런이 22개였습니다. 투런 11개, 스리런 4개, 만루홈런 1개였죠. 홈런만으로 60타점을 만들었지만, 전체 타점은 86개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당시 팬들이 느낀 묘한 아쉬움이 나옵니다. 홈런 숫자는 압도적인데, 득점권에서 한 방 더 터졌다면 시즌의 체감 가치는 더 커졌을 겁니다.
사실 이건 라모스 개인만의 문제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홈런 타자는 앞 타자들의 출루 흐름, 타순 배치, 상대 투수의 승부 방식에 따라 타점 생산이 크게 흔들립니다. 라모스가 워낙 위험한 타자였기 때문에 주자가 있을 때 더 까다로운 공을 만난 것도 분명했을 겁니다. 그래도 38홈런이라는 숫자 옆에 100타점이 붙지 못한 건 기록을 좋아하는 팬 입장에서는 계속 눈에 밟힙니다.
라모스 시즌이 아직 회자되는 까닭
라모스의 2020년은 짧고 강했습니다. 다음 시즌에는 부상과 부진이 겹치며 51경기 8홈런에 그쳤고, 결국 2020년의 폭발력을 길게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강한 잔상이 남습니다. 오래 지배한 타자라기보다, 한 시즌 동안 LG 홈런사의 천장을 확 올려놓고 사라진 타자에 가깝습니다.
개인적으로 라모스의 38홈런 시즌은 숫자보다 감각으로 먼저 기억됩니다. 잠실에서도 저 정도로 넘길 수 있구나, LG에서도 리그 홈런왕 경쟁을 현실적으로 말할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시즌이었습니다. 스포츠 기록은 오래 남지만, 그 기록이 만들어지던 당시의 공기까지 같이 남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라모스의 2020년은 LG 팬들에게 딱 그런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