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리즈 시구를 다시 봤더니 팀의 시간이 보였다

요즘 한국시리즈를 볼 때면 첫 투구 전에 잠깐 화면을 멈추게 된다. 시구자가 마운드에 서고, 포수가 공을 받는 몇 초 동안 그 팀이 지나온 시간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경기 기록표에 시구는 남지 않는다. 그런데 누가 공을 던지고 누가 받았는지를 알고 보면, 그날의 승부도 조금 다른 표정으로 보인다.
2026년 첫 공에 담긴 5년의 거리
올해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자는 KT 코치 박경수였다. KBO가 그를 소개하며 꺼낸 기록은 2021년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상이다. 당시 박경수는 KT의 창단 첫 통합 우승을 이끈 주역이었고, 5년 뒤에는 지도자로 수원 마운드에 다시 섰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어도 역할은 달라졌다. 그 변화가 올해 첫 시구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KT 팬에게 박경수의 이름은 우승 장면과 바로 이어진다. 선수 시절 몸을 던져 지킨 그라운드에 코치로 돌아와 첫 공을 던졌으니, 관중은 시구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2021년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기억이 2026년 경기의 승패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시구는 관중이 품고 들어온 기대를 보여주고, 승부는 그 뒤 선수들이 새로 쓴다.
2차전에는 KT 초대 감독 조범현이 시구자로, 삼성의 전설적인 포수 이만수가 시포자로 나섰다. 한쪽 팀의 역사만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라 양 팀의 인물을 한 배터리로 묶은 셈이다. 공 한 개가 투수판에서 홈플레이트까지 가는 사이, 팬마다 떠올리는 시절도 달랐을 것이다.
우승했던 배터리가 다시 만난 2023년
2023년 LG와 KT의 한국시리즈 1차전도 시구와 시포를 함께 봐야 기억에 남는다. LG의 1994년 우승 멤버 김용수가 공을 던지고 김동수가 받았다. 김용수는 그해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였고, 두 선수는 당시에도 배터리를 이뤘다. KBO는 LG가 29년 만의 우승에 도전하는 첫 경기에서 이들을 다시 불렀다.
그 장면의 재미는 현재의 선수들이 따라야 할 이야기가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는 데 있다. 관중석에는 1994년 우승을 기억하는 팬도, 기록으로만 접한 팬도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자리를 잡자 29년이라는 긴 간격이 눈앞의 거리로 줄었다. 첫 공을 받는 사람이 김동수였기에 김용수의 시구도 더 또렷해졌다.
하지만 LG는 그 1차전에서 졌다. 이후 4연승으로 우승했다. 시구가 좋은 징조였다는 식으로 결과를 거꾸로 맞춰 읽으면 실제 시리즈의 흐름을 놓친다. 첫 경기 패배 뒤 네 경기를 내리 가져온 기록이야말로 그해 LG의 우승을 설명한다. 시구는 그 과정을 응원하며 지켜본 팬들에게 출발점으로 남았다.
한화의 시구 순서를 따라가 보니
2025년 한화의 홈 경기 시구는 차전마다 다른 기억을 불렀다. 3차전에는 1999년 우승을 확정할 때 배터리였던 구대성과 조경택이 각각 시구와 시포를 맡았다. 5차전에는 한화 영구결번 선수 정민철이 공을 던지고 장종훈이 타석에 섰다. 정민철은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2승을 거둔 투수다.
같은 팀의 옛 선수들이 나섰지만 장면의 구성은 달랐다. 3차전은 우승 당시 공을 주고받던 두 사람이 다시 마주 선 순간이었다. 5차전은 투수 정민철과 타자 장종훈이 각자의 자리에서 한화의 역사를 보여줬다. 시구자 이름만 적어 두면 놓치기 쉬운 차이다. 시포와 시타까지 함께 봐야 선정 이유가 선명해진다.
4차전 시구자 남희석의 이력도 흥미롭다. KBO에 따르면 그는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남자 연예인 최초로 시구했고, 2025년 다시 한화의 홈 경기 마운드에 올랐다. 옛 우승 멤버 사이에 오래 응원해 온 팬의 시간이 놓인 셈이다. 선수 기록과 팬의 기억이 번갈아 등장하는 순서가 시리즈의 분위기를 풍성하게 했다.
시구를 보고 나면 확인하게 되는 것
한국시리즈 시구 명단을 볼 때 나는 세 가지를 확인한다. 시구자가 어느 해, 어떤 경기와 연결되는지. 공을 받거나 타석에 서는 사람은 누구인지. 그리고 그날 경기가 시리즈 몇 차전인지다. 1차전은 새 승부의 시작이고, 뒤로 갈수록 앞선 경기의 결과가 관중의 표정에 쌓인다. 같은 인물이 던져도 차전에 따라 장면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다.
물론 시구의 의미를 경기력과 섞어 읽을 필요는 없다. 시구자는 선발투수의 구위나 불펜 운영을 바꾸지 않는다. 경기 흐름을 알고 싶다면 점수 차가 벌어진 이닝, 주자가 쌓인 상황, 투수 교체 시점을 따로 봐야 한다. 그러고 나서 경기 전 장면을 떠올리면 더 재미있다. 팬들이 어떤 기억을 안고 입장했는지와 선수들이 그날 실제로 만들어 낸 기록이 한 경기 안에서 만난다.
박경수의 2021년과 2026년, 김용수와 김동수 사이의 29년, 한화가 다시 불러낸 1999년. 이런 숫자는 시구를 단순한 행사보다 오래 기억하게 만든다. 나는 다음 한국시리즈에서도 첫 공이 날아갈 때 포수 뒤편까지 눈여겨볼 것 같다. 그 짧은 장면에 경기 기록표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팀의 시간이 들어 있어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