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경기 던진 롯데 정현수를 다시 보니, 혹사 후유증 경고가 괜한 말이 아니었다

얼마 전 롯데 불펜 기록을 다시 훑다가 정현수 이름에서 손이 멈췄습니다. 2025년 82경기. 숫자 하나만 놓고 보면 ‘많이 던졌다’ 정도로 지나갈 수도 있는데, 불펜 투수의 하루를 떠올리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등판한 날만 피곤한 게 아닙니다. 몸을 풀고, 대기하고, 상황이 바뀌면 다시 앉았다가 또 일어납니다. 기록지에 남는 건 47⅔이닝이지만, 몸에 쌓이는 피로는 그보다 훨씬 두껍습니다.
82경기라는 숫자가 말하는 것
정현수는 2025시즌 롯데에서 82경기에 등판해 2승 12홀드, 평균자책점 3.97을 남겼습니다. KBO리그 전체로 봐도 엄청난 등판 수였습니다. 80경기 이상 던진 투수 자체가 흔하지 않고, 2008년 정우람 이후 82경기 이상 등판 사례가 다시 나왔다는 점에서 기록의 무게가 큽니다.
근데 여기서 봐야 할 건 ‘잘 버텼다’가 전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정현수는 강속구로 찍어누르는 타입이 아니었습니다. 140km대 초중반 직구와 낙차 큰 커브, 짧은 팔 스윙, 좌타자 상대 각도로 버틴 투수였습니다. 그러니까 구속 2~3km가 빠져도 타자 입장에서는 체감 차이가 꽤 큽니다. 원래 155km를 던지는 투수의 2km 하락과, 143km 언저리에서 싸우는 투수의 2km 하락은 의미가 다릅니다.
시범경기 부진은 단순한 난조였을까
2026년 봄에 나온 경고음은 꽤 선명했습니다. 정현수는 시범경기 한화전에서 아웃카운트를 잡지 못하고 볼넷, 몸에 맞는 공, 홈런으로 3실점했습니다. 당시 3경기 2이닝 평균자책점 18.00. 물론 시범경기 기록만으로 시즌 전체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구속 저하와 제구 흔들림이 같이 왔다는 점이 찜찜했습니다.
김태형 감독도 구속 이야기를 직접 꺼냈습니다. 140km 초반으로는 타자를 상대하기 어렵고, 최소 143~144km는 나와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이 말이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정현수 같은 유형에게는 꽤 정확한 진단입니다. 좌완이라는 이점, 커브의 낙차, 타이밍 싸움이 모두 통하려면 직구가 존 안에서 버텨줘야 합니다. 직구가 밀리면 타자는 커브를 더 오래 볼 수 있고, 투수는 코너만 찌르려다 볼넷을 늘립니다.
기록지 밖에 남는 피로
불펜 투수의 혹사는 이닝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정현수의 2025년 이닝은 47⅔이닝이었지만 경기 수는 82경기였습니다. 한 경기 평균 이닝은 길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등판 빈도는 리그 최상단이었습니다. 불펜에서는 ‘오늘 던졌느냐’보다 ‘오늘도 던질 준비를 했느냐’가 더 중요한 날이 많습니다.
- 2025시즌: 82경기, 47⅔이닝, 2승 12홀드, 평균자책점 3.97
- 2026 시범경기 초반: 3경기 2이닝, 평균자책점 18.00
- 2026 정규시즌 중반 기록: 11경기 5이닝, 평균자책점 5.40, WHIP 2.20
이 흐름을 보면 ‘작년에 많이 던졌으니 올해 무조건 무너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선수 몸 상태는 개인차가 크고, 비시즌 훈련이나 회복 과정도 다릅니다. 다만 의심할 만한 신호는 분명합니다. 많은 등판, 봄철 구속 저하, 흔들린 제구, 줄어든 1군 활용 폭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니까요.
롯데 불펜 운영의 숙제
정현수의 문제는 선수 한 명의 컨디션 이슈로만 보기 어렵습니다. 롯데는 오랫동안 믿을 만한 좌완 불펜을 찾는 팀이었습니다. 그래서 정현수가 2025년에 버텨준 건 반가운 사건이었습니다. 좌타자 한 명을 지우는 역할을 넘어, 상황에 따라 한 이닝 일부를 맡길 수 있는 카드가 생긴 겁니다.
그런데 그 반가움이 곧 부담으로 바뀌었습니다. 좌완 대체 자원이 넉넉하지 않으면 벤치는 같은 선수를 반복해서 찾게 됩니다. 결과가 좋으면 더 자주 부르고, 위기가 오면 또 찾습니다. 사실 이건 감독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팀 구성의 문제이고, 시즌 전력 설계의 문제입니다. 한 명이 너무 잘 버티면 팀은 그 버팀을 전력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정현수가 2025년에 보여준 가치는 분명했습니다. 피안타율 2할대 초반, WHIP 1.26 수준이면 좌완 불펜으로 충분히 쓸 만했습니다. 하지만 82경기 등판은 ‘성공한 활용’과 ‘위험한 의존’ 사이에 걸쳐 있는 숫자입니다. 특히 아직 커리어 초반인 투수에게 그런 시즌이 너무 빨리 왔다는 점이 걸립니다.
정현수에게 필요한 건 증명이 아니라 회복이다
팬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 그렇게 잘 던졌는데 왜 올해는 공이 안 오나 싶습니다. 그런데 선수에게 필요한 시간을 ‘멘탈 문제’로만 몰아가면 길을 놓칩니다. 구속이 떨어지고 제구가 흔들릴 때는 몸의 밸런스, 릴리스 포인트, 하체 힘, 회복 속도까지 같이 봐야 합니다.
정현수는 이미 1군에서 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82경기 등판은 아무나 받는 기회가 아니고, 아무나 버티는 일정도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더 큰 각오가 아니라 더 똑똑한 관리에 가깝습니다. 등판 간격을 넓히고, 좌타자 전담이라는 좁은 역할부터 다시 잡고, 직구 평균 구속이 회복되는 구간을 기다리는 식의 접근이 현실적입니다.
롯데도 여기서 배워야 합니다. 불펜은 단기 성과가 달콤합니다. 한 명이 계속 막아주면 그날 경기는 편해집니다. 하지만 시즌은 길고, 젊은 투수의 커리어는 더 깁니다. 정현수의 82경기는 박수받을 기록이면서 동시에 다음 운영을 바꾸라는 신호였습니다. 그 경고를 그냥 지나치면, 롯데는 또 다른 정현수를 같은 방식으로 소모하게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