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 이고은 트레이드, 기록표를 다시 보니 달라진 건 세터 한 자리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 V리그 기록표를 다시 넘겨보다가 흥국생명의 2024년 여름 움직임이 생각보다 훨씬 큰 갈림길이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이고은 영입’이라는 이름이 먼저 보였지만, 숫자를 따라가면 이건 단순한 세터 교체가 아니라 팀의 공격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에 가까웠습니다.
이고은 트레이드가 던진 첫 신호
흥국생명은 2024년 6월 페퍼저축은행과 트레이드를 통해 세터 이고은과 2025-2026시즌 2라운드 신인지명권을 받았습니다. 반대로 이원정과 2025-2026시즌 1라운드 지명권을 내줬죠. 같은 시기 IBK기업은행에서 리베로 신연경을 데려오고 미들블로커 김채연을 보낸 것도 함께 봐야 합니다. 세터와 리베로를 동시에 손본 셈이니까요.
이 선택이 흥미로운 건 비용입니다. 1라운드 지명권을 내주고 2라운드 지명권을 받는 구조라면, 구단은 당장의 우승 확률을 미래 자원보다 높게 본 겁니다. 사실 김연경이 있는 팀에서 ‘언젠가’보다 ‘지금’이 더 크게 들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흥국생명은 이미 여러 차례 정상 문턱에서 멈췄고, 팬들이 보는 기준도 단순한 상위권이 아니라 우승이었습니다.
세터가 바뀌면 공격 지도도 바뀐다
세터 교체는 기록표에 곧장 드러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득점은 공격수 이름으로 찍히고, 리시브는 리베로와 아웃사이드히터가 먼저 보입니다. 그런데 배구를 오래 보다 보면 세터가 바뀐 팀은 공이 흐르는 길부터 달라집니다. 이고은 합류 이후 흥국생명이 보여준 변화도 바로 그 지점이었습니다.
가장 눈에 띈 건 김연경의 후위 공격 활용입니다. 일간스포츠 보도에 따르면 2024-2025시즌 초반 김연경은 4경기에서 백어택을 18차례 시도했습니다. 경기당 4.5회입니다. 이전 시즌 백어택 비율이 7.7%였던 것과 비교하면 초반 12.4%까지 올라간 변화가 꽤 선명했습니다. 이 숫자는 단순히 김연경이 더 많이 때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대 블로커가 전위만 보고 움직이기 어려워졌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측면 의존도를 줄이는 방식
흥국생명은 김연경이라는 압도적인 카드를 갖고 있지만, 그 카드에만 기대면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읽힙니다. 특히 챔피언결정전 같은 무대에서는 상대가 한두 경기 안에 패턴을 잡아냅니다. 이고은의 가치는 여기서 나옵니다. 김연경, 외국인 공격수, 중앙, 후위 공격까지 공이 조금씩 흩어지면 상대 블로킹 라인은 반 박자씩 늦어집니다.
- 김연경의 후위 공격 비중 상승
- 중앙 공격과 속공 활용 증가
- 정윤주, 김다은 같은 국내 공격수의 선택지 확대
- 긴 랠리 이후에도 비교적 안정적인 볼 배급
물론 모든 변화가 세터 한 명 덕분이라고 말하면 과합니다. 리시브가 버텨줘야 하고, 공격수의 컨디션도 맞아야 합니다. 근데 세터가 공을 줄 수 있다고 믿는 루트가 많아지면 팀 전체의 표정이 달라집니다. 흥국생명은 그 부분에서 이전보다 답답함이 줄어든 경기를 꽤 많이 만들었습니다.
전력보강의 진짜 포인트는 균형이었다
흥국생명의 보강을 이고은 하나로만 보면 반쪽짜리 해석입니다. 신연경 영입까지 붙여놓고 보면 구단이 건드린 건 ‘첫 터치와 두 번째 터치’였습니다. 리시브와 디그가 안정되면 세터가 선택할 수 있는 공격 루트가 늘어나고, 세터의 선택이 넓어지면 공격수의 부담이 분산됩니다. 배구에서 이 연결은 정말 큽니다.
신연경은 수비와 리시브에서 계산이 서는 선수입니다. 공격 화력만 보고 팀을 만들면 한 세트는 시원하게 이길 수 있어도, 5세트 승부나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는 버티는 힘이 부족해질 때가 있습니다. 흥국생명이 김채연을 내주고 신연경을 데려온 건 미들블로커 뎁스의 아쉬움을 감수하더라도 수비 안정성을 택했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이고은의 커리어가 말해주는 것
이고은은 1995년생 세터로, 한국도로공사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뒤 여러 팀을 거쳤습니다. 흔히 이런 이력을 두고 저니맨이라고 부르지만, 세터 포지션에서는 조금 다르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팀의 공격수와 맞춰봤다는 건 그만큼 적응 표본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흥국생명처럼 우승 압박이 큰 팀에서는 이 경험이 꽤 실용적입니다.
스포츠경향 인터뷰에서 이고은은 페퍼저축은행을 상대하며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감정선도 경기 흐름에서는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세터는 공을 올리는 선수이면서 동시에 팀의 온도를 조절하는 선수입니다. 흔들릴 때 빠르게 중앙을 쓰느냐, 에이스에게 한 번 더 맡기느냐, 서브 리듬을 어떻게 끊느냐가 모두 경기의 결을 바꿉니다.
트레이드 성공 여부를 숫자로만 보면 놓치는 것
이 트레이드를 평가할 때 단순히 이고은의 세트 성공 수치만 보면 조금 밋밋할 수 있습니다. 세터 기록은 원래 야박합니다. 좋은 선택은 공격수 득점으로 남고, 나쁜 선택은 세터의 판단 미스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고은 트레이드를 볼 때 흥국생명의 공격 분포, 김연경의 후위 활용, 국내 공격수들의 득점 참여율, 그리고 긴 랠리 이후 범실 흐름을 같이 보는 편입니다.
흥국생명이 원했던 그림은 분명했습니다. 김연경에게만 기대는 팀이 아니라, 김연경이 있어서 다른 공격 루트까지 살아나는 팀. 이 차이는 큽니다. 전자는 상대가 김연경을 막으면 길이 좁아지고, 후자는 상대가 김연경을 의식하는 순간 다른 길이 열립니다. 이고은의 트레이드는 바로 그 두 번째 그림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대가는 작지 않았습니다. 신인지명 1라운드 카드를 내준 건 장기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연경과 함께 우승을 노리는 시간표에서는 미래의 가능성보다 현재의 완성도가 더 절박했을 겁니다. 솔직히 팬 입장에서 이런 트레이드는 늘 양면적입니다. 유망주 자산을 잃는 아쉬움이 있고, 동시에 당장 코트 위에서 달라진 공 흐름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흥국생명 전력보강의 진짜 재미는 이름값보다 연결에 있습니다. 이고은이 올린 공 하나가 김연경의 백어택으로 이어지고, 신연경의 디그 하나가 다시 속공 선택으로 이어지는 장면들. 그런 장면이 쌓이면 팀은 단순히 강해지는 게 아니라 덜 읽히는 팀이 됩니다. 저는 이 트레이드를 그래서 ‘세터 영입’보다 ‘공격 루트 재설계’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