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 없는 흥국생명을 따라가 봤더니, 요시하라 감독의 우승 조준은 숫자로 보였다

김연경 이후의 흥국생명, 생각보다 빨리 버텼다
요즘 V리그 여자부를 보다 보면 흥국생명 경기는 묘하게 시선이 오래 간다. 단순히 이겼다, 졌다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시즌 통합우승 팀에서 김연경이 은퇴했고, 마르첼로 아본단자 감독도 떠났다. 보통 이 정도 변화면 팀의 기준점이 흔들린다. 그런데 흥국생명은 요시하라 토모코 감독 체제에서 예상보다 빠르게 순위 싸움 안쪽으로 들어왔다.
흥미로운 건 출발점이었다. 2025-26시즌 개막 전 여자부 미디어데이에서 흥국생명은 우승 후보 표를 받지 못했다. 김연경 공백이 워낙 컸고, 공격의 확실한 해결사가 사라졌다는 평가가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2026년 1월 20일 기준 흥국생명은 13승 10패, 승점 41로 3위에 올라 있었다. 2위 현대건설과 승점 차도 1점이었다. 이 정도면 ‘버티는 팀’이 아니라 다시 상위권을 압박하는 팀이었다.
요시하라 감독의 이력은 그냥 이름값이 아니다
요시하라 감독이 흥국생명 지휘봉을 잡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일본 JT 마블러스 시절의 기록이다. 2015년부터 2024년까지 9시즌 동안 리그 우승 2회, 준우승 3회. 2015-16시즌에는 1부 승격을 이끌었고, 2023-24시즌에는 정규리그 전승이라는 보기 드문 기록도 만들었다. 선수 시절에는 일본 국가대표 미들블로커로 뛰었던 인물이다.
이 이력에서 중요한 건 ‘강팀을 맡아봤다’가 아니라, 팀을 단계별로 끌어올린 경험이 있다는 점이다. 흥국생명은 이미 우승 경험이 있는 팀이지만, 2025-26시즌의 출발선은 전혀 달랐다. 김연경이라는 압도적인 축이 빠진 뒤라 공격 배분, 리시브 안정, 중앙 활용, 교체 타이밍까지 전부 새로 맞춰야 했다. 요시하라 감독이 말한 챔피언결정전 진출 목표도 그래서 허세처럼 들리지 않았다. 우승을 조준하려면 먼저 팀의 무기 수를 늘려야 한다는 접근이 꽤 현실적이었다.
승부처에서 보인 건 이름보다 선택이었다
1월 18일 IBK기업은행전은 요시하라 감독 색깔을 보여준 경기였다. 흥국생명은 원정에서 세트스코어 3-2로 이겼고, 당시 5연승 중이던 기업은행의 흐름을 끊었다. 숫자만 보면 풀세트 승리지만, 내용을 보면 더 재미있다. 외국인 공격수 레베카가 공격 성공률 27%에 그치며 흔들렸고, 팀은 2세트와 3세트를 내주며 밀렸다.
그런데 4세트에 요시하라 감독은 레베카와 피치를 빼고 문지윤, 김수지를 투입했다. 문지윤은 4세트 선발로 나서 5득점으로 공백을 메웠고, 흥국생명은 분위기를 돌렸다. 5세트에는 다시 레베카를 넣었다. 이 장면이 좋았다. 부진한 선수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도, 완전히 접어버리는 것도 아니었다. 세트 흐름에 맞춰 빼고, 다시 넣을 타이밍을 잡았다. 감독의 승부수는 결국 선수층을 실제 경기 안에서 쓰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3연패 뒤 현대건설전, 우승 조준의 체력 검사
상위권 팀이 진짜 강한지는 연승 때보다 연패 뒤에 보인다. 2026년 3월 5일 현대건설전이 그랬다. 당시 현대건설은 21승 11패, 승점 61로 2위였고 6연승 중이었다. 반면 흥국생명은 17승 16패, 승점 53으로 3위였지만 3연패 중이었다. 분위기만 놓고 보면 현대건설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경기 결과는 흥국생명의 3-2 승리였다. 세트 스코어는 14-25, 25-20, 10-25, 25-20, 15-13. 사실 이런 스코어는 예쁘지 않다. 1세트와 3세트를 크게 내줬고, 흐름도 몇 번이나 끊겼다. 그런데 4세트와 5세트를 가져왔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승을 노리는 팀은 매번 완벽할 수 없다. 흔들린 날에도 승점과 승리를 챙기는 능력이 필요하다. 흥국생명은 그 경기에서 연패를 끊었고, 동시에 상위권 직접 경쟁에서 버틸 수 있다는 근거를 만들었다.
흥국생명의 우승 조준은 감성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3월 10일 IBK기업은행전도 비슷한 맥락이다. 흥국생명은 3-2로 이기며 승점 57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요시하라 감독은 경기 뒤 기복을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반응이 오히려 흥국생명 현재 위치를 잘 보여준다. 이기는 힘은 생겼지만, 우승권 팀으로 가려면 세트별 편차를 줄여야 한다. 특히 5세트 승리가 많다는 건 뒷심의 증거이면서도, 동시에 초반 장악력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연경이 있던 시절의 흥국생명은 중요한 순간 공의 방향이 비교적 명확했다. 지금은 다르다. 김다은, 최은지, 이다현, 문지윤, 피치 같은 자원들이 상황별로 부담을 나눠야 한다. 이 과정은 답답해 보일 때도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특정 선수 의존도를 낮추는 방향이다. 요시하라 감독의 우승 조준이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완성된 슈퍼스타 중심 팀을 굴리는 게 아니라, 흔들리는 전력을 조합해 다시 챔피언결정전 레벨로 끌어올리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흥국생명의 이번 시즌을 볼 때 가장 보고 싶은 숫자는 단순 승수보다 세트 득실과 20점 이후 공격 성공률이다. 우승을 향한 팀은 접전에서 강해야 하고, 동시에 접전으로 끌려가기 전에 끝낼 줄도 알아야 한다. 요시하라 감독의 흥국생명은 아직 매끈한 팀은 아니다. 근데 그래서 더 볼 맛이 있다. 김연경 이후의 빈자리를 한 명의 이름으로 덮는 게 아니라, 경기마다 다른 방식으로 메워가고 있으니까.
참고: 연합뉴스, 서울신문, OSEN, 쿠키뉴스 보도와 한국배구연맹 경기 기록 흐름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