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현대건설을 한중일 코트에 올려놓고 보니 보인 배구 격차의 진짜 이야기

얼마 전 제주에서 잡힌 한·중·일 여자배구 클럽 매치 일정을 보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단순했다. 흥국생명과 현대건설이 일본 오사카 마블러스, 중국 상하이 브라이트 유베스트를 만나면 과연 점수판보다 무엇이 먼저 보일까. 사실 이런 경기는 승패도 중요하지만, 리그의 체력과 시스템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들여다보는 창에 가깝다.
흥국생명과 현대건설, 국내 기준으로는 충분히 강하다
2024-25시즌 V리그 여자부만 놓고 보면 흥국생명은 확실한 기준점이었다. 정규리그 27승 9패, 승점 81로 1위를 찍었고, 챔피언결정전까지 가져가며 6시즌 만의 통합우승을 만들었다. 현대건설도 21승 15패, 승점 66으로 2위에 올랐다. 국내 리그 안에서는 두 팀이 전력의 안정감, 베테랑 활용, 미들블로커 경쟁력에서 분명 앞쪽에 있었다.
특히 흥국생명은 김연경이라는 특수한 해답지가 있었다. 김연경은 은퇴 시즌에도 585득점, 공격 성공률 46.03%, 리시브 효율 41.22%를 기록했다. 국내 선수 중 득점 생산성과 리시브 안정감을 동시에 이렇게 끌고 가는 선수는 거의 없었다. 현대건설은 양효진, 이다현, 김다인 라인을 중심으로 중앙과 세터 운영에서 강점이 분명했다. 근데 국제 클럽전으로 가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국내에서 강한 팀이 곧바로 동아시아 기준의 압도적 팀이 되는 건 아니다.
일본은 빠르고, 중국은 높다
일본 오사카 마블러스는 최근 3시즌 연속 일본 리그 파이널에 올랐고 2024-25시즌 우승까지 가져간 팀이다. 일본 배구의 무서운 점은 한 방의 높이보다 첫 터치 이후의 속도다. 리시브가 흔들려도 세터 주변으로 공을 살려놓고, 공격수들이 이미 도움닫기 타이밍을 잡고 들어간다. 한국 팀 입장에서는 블로킹 위치를 맞추기도 전에 퀵오픈과 파이프가 지나가는 장면이 나올 수 있다.
중국 상하이는 또 다르다. 최근 4시즌 연속 중국 리그 파이널에 올랐고 2025-26시즌 정상에 오른 팀으로 소개됐다. 중국 팀을 볼 때 늘 먼저 체크하는 건 신장과 타점이다. 같은 오픈 공격이라도 공을 때리는 높이가 다르면 수비 라인의 출발점이 달라진다. 한국 팀이 블로킹 손 모양과 유효 블로킹으로 버텨야 하는 이유다. 그냥 ‘높다’가 아니라, 높은 공을 여러 번 반복해도 공격 효율이 크게 무너지지 않는 게 중국 상위권 팀의 힘이다.
이번 매치는 완전체 대 완전체가 아니었다
다만 이번 제주 슈퍼매치를 곧장 리그 격차의 최종 판정처럼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대회 안내에 따르면 국가대표 롱리스트에 포함된 선수와 외국인 선수는 출전 제한 조건이 있었다. 이 조건 하나가 경기 해석을 크게 바꾼다. V리그에서 외국인 공격수 의존도는 낮지 않다. 아포짓 한 자리가 빠지면 세터의 선택지는 줄고, 국내 공격수의 결정력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흥국생명과 현대건설이 이런 무대에서 보여줘야 할 건 단순한 승리보다 구조다. 첫째, 리시브가 흔들린 뒤 하이볼 처리 성공률이 얼마나 되는지. 둘째, 미들블로커가 실제 득점뿐 아니라 상대 블로커를 얼마나 묶는지. 셋째, 20점 이후 세터 선택이 한쪽으로 몰리지 않는지. 이 세 가지가 보이면 점수 차가 크지 않아도 팀의 국제 경쟁력은 꽤 잘 읽힌다.
한국 배구의 격차는 기술보다 두께에서 먼저 보인다
솔직히 한국 여자배구가 일본, 중국과 비교될 때 기술이 아예 뒤처진다고 말하긴 어렵다. 좋은 세터, 좋은 리베로, 좋은 미들블로커는 계속 나온다. 문제는 그 숫자가 충분히 두껍지 않다는 데 있다. 주전 6명으로 한 세트는 버틸 수 있어도, 2세트 중반부터 교체 카드의 질이 떨어지면 경기 흐름이 급격히 넘어간다.
- 일본은 리시브와 수비 기본기가 리그 전체 평균을 끌어올린다.
- 중국은 신체 조건과 높은 타점 공격수가 팀 전술의 출발점이 된다.
- 한국은 특정 스타와 외국인 공격수의 비중이 커질 때 팀 색깔이 좁아진다.
흥국생명과 현대건설이 한·중·일 클럽전에서 의미를 만들려면, 국내 리그에서 통하던 ‘확실한 해결사’ 공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일본을 상대로는 랠리 속도를 버텨야 하고, 중국을 상대로는 블로킹 위에서 맞고 나오는 공까지 다시 공격으로 연결해야 한다. 결국 격차는 한 번의 강타가 아니라 두 번째 연결, 세 번째 반격에서 드러난다.
점수판보다 오래 남는 장면
이런 국제 클럽전은 팬 입장에서 꽤 귀한 자료다. 흥국생명은 김연경 이후의 팀 정체성을 만들어야 하고, 현대건설은 중앙 중심 배구가 국제 높이와 속도 앞에서도 통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오사카와 상하이는 각각 일본과 중국 리그의 현재 감각을 가져온다. 한 코트에 올려놓으면, 우리가 막연히 말하던 한·중·일 배구 격차가 훨씬 구체적인 장면으로 바뀐다.
참고한 대회 정보는 중앙일보 보도와 일간스포츠 보도, 2024-25시즌 기록은 뉴시스 순위 보도와 연합뉴스 개인 기록 보도를 기준으로 봤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경기가 더 자주 열렸으면 한다. 이겨서 기분 좋은 경기보다, 어디가 부족한지 숫자와 장면으로 동시에 남는 경기가 한국 배구에는 더 오래 남을 자산이라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