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주, 속 꽉 찬 사연을 기록으로 다시 읽어봤다

얼마 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영상을 다시 보다가 한기주의 이름에서 잠깐 멈췄다. 기억에는 아슬아슬했던 등판과 ‘속꽉남’이라는 별명이 먼저 남아 있었다. 그런데 KBO 기록을 펼쳐 놓으니 다른 장면도 보였다. 그해 그는 KIA에서 26세이브, 평균자책점 1.71을 기록한 마무리 투수였다. 같은 해의 두 숫자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10억 원의 기대를 안고 첫해 140⅔이닝
한기주는 2006년 KIA의 1차 지명을 받았다. 당시 계약금 10억 원으로 ‘10억 팔’이라는 이름도 따라붙었다. 이 정도 기대를 안고 들어온 신인이면 마운드에 설 때마다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실제 첫 시즌 성적도 가볍지 않았다. 44경기에 나와 140⅔이닝을 던졌고, 10승 11패에 평균자책점 3.26을 남겼다.
10승만 보면 선발 유망주의 성공적인 출발처럼 보인다. 하지만 44경기와 140⅔이닝을 함께 읽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여러 역할을 맡았다는 뜻이다. 한 시즌에 그만큼 공을 던진 뒤, 다음 해에는 팀의 마지막 이닝까지 책임지게 됐다. 어린 투수에게 걸린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기록의 배열만으로도 느껴진다.
마무리로 빛난 2년, 그래서 더 복잡한 기억
2007년 한기주는 55경기에서 25세이브, 평균자책점 2.43을 기록했다. 2008년에는 46경기에서 26세이브를 거두며 평균자책점을 1.71까지 낮췄다. 두 시즌 세이브가 51개다. 당시 KIA의 경기를 챙겨 본 팬이라면 그가 9회에 올라올 때의 긴장감과 기대를 함께 기억할 만하다.
특히 2008년 수치가 눈에 띈다. 58이닝 동안 자책점은 11점, 피홈런은 1개였다. 마무리 투수에게 필요한 ‘리드를 지키는 능력’을 리그 경기에서는 분명히 보여준 셈이다. 다만 2006년 140⅔이닝, 2007년 70⅓이닝, 2008년 58이닝이라는 흐름도 같이 봐야 한다. 좋은 성적이 곧 몸의 부담이 적었다는 뜻은 아니다. 등판 간격과 부상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성공의 속도가 빨랐던 것은 확실하다.
‘속이 꽉 찬 남자 99.9’는 어떻게 붙었나
그해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정반대 장면이 나왔다. 한기주는 미국과의 첫 경기에서 아웃카운트를 잡지 못한 채 3실점했고, 일본전 9회에도 주자를 남기고 내려왔다. 당시 보도에는 두 경기 뒤 그의 평균자책점이 계산되지 않을 만큼 극단적인 상황을 빗대 ‘99.9’라는 숫자가 등장한다. 팬들은 유행하던 노래 제목에 그 숫자를 겹쳐 ‘속이 꽉 찬 남자 99.9’, 줄여서 ‘속꽉남’이라고 불렀다.
솔직히 별명의 어감은 가볍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은 가볍지 않다. 한국은 결국 야구에서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땄다. 한기주도 그 대표팀의 일원이었다. 반면 그의 몇 차례 등판은 오래도록 놀림의 소재가 됐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올림픽의 짧은 장면이 KBO 정규시즌 26세이브와 평균자책점 1.71을 거의 가려 버렸다는 점이다. 국제대회의 압박과 부진은 실제였고, 같은 해 리그에서 보여준 좋은 투구도 실제였다. 어느 한쪽만 남기면 선수의 모습이 납작해진다.
돌아온 마운드에서 보인 다른 숫자
2009년에는 26경기, 34이닝, 4세이브로 기록이 줄었다. 이후 수술과 재활을 거쳤고, KBO 1군 기록에는 2010년과 2013~2014년의 등판이 없다. 2015년 다시 1군 마운드에 섰을 때는 7경기 8⅓이닝을 던졌다. 전성기 세이브 숫자와 비교하면 작아 보이지만, 오랜 공백 뒤에 남긴 이닝이라는 점에서 무게가 다르다.
2016년에는 29경기 56⅔이닝을 소화하며 4승을 올렸고, 선발 등판도 했다. 평균자책점 7.62가 말하듯 예전 구위로 돌아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한 가지 보직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시 경기에 나섰다는 사실은 남는다. 2017년 말 KIA에서 삼성으로 트레이드된 뒤에는 2018년 33경기에서 39이닝을 던졌다. KBO에 남은 통산 성적은 272경기, 26승, 71세이브, 455⅓이닝이다.
한기주를 떠올릴 때 나는 이제 ‘99.9’보다 51세이브와 다시 던진 8⅓이닝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얼마나 빨리 정상급 마무리가 됐는지를, 다른 하나는 그 자리로 돌아오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준다. 야구 기록이 재미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숫자 하나보다 숫자 사이의 시간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