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퍼 해체 위기에서 SOOP 수퍼스까지, 숫자로 따라간 생존기

얼마 전 V리그 여자부 소식을 보다가 페퍼저축은행 이름이 사라지고 SOOP 수퍼스가 등장한 흐름을 다시 보니, 이건 단순한 구단명 변경 뉴스가 아니었다. 경기 결과만 보면 하위권 팀 하나가 새 주인을 찾은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기록을 붙여 보면 여자배구 7구단 체제와 광주 배구 팬덤, 그리고 플랫폼 기업의 스포츠 진입이 한꺼번에 걸린 사건이었다.
해체 위기라는 말이 가볍지 않았던 이유
페퍼저축은행 AI 페퍼스는 2021년 창단한 V리그 여자부 7번째 구단이었다. 그런데 창단 이후 성적표는 꽤 거칠었다. 2021-22시즌 3승 28패, 2022-23시즌 5승 31패, 2023-24시즌 5승 31패, 2024-25시즌 11승 25패. 네 시즌 연속 최하위였고, 2023-24시즌에는 남녀부 통틀어 23연패라는 아픈 기록도 남았다.
근데 2025-26시즌은 조금 달랐다. 페퍼는 2월 기준 창단 후 처음으로 최하위 탈출을 확정했고, 시즌 후반에는 13승을 넘기며 구단 최다승 흐름을 만들었다. 시즌 막판에는 15승 20패, 승점 44점, 6위까지 찍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성적만 놓고 보면 드디어 바닥을 딛고 올라오는 타이밍이었다. 그래서 매각과 해체 위기 이야기가 더 묘하게 들렸다. 팀이 완전히 무너진 시점이 아니라, 처음으로 숫자가 나아지던 시점에 존속 문제가 터졌기 때문이다.
SOOP은 후보였고, 곧 새 주인이 됐다
처음 배구계에서 나온 표현은 SOOP이 인수 후보라는 쪽에 가까웠다. 인터넷 방송 플랫폼 기업, 옛 아프리카TV였던 SOOP이 한국배구연맹에 인수 의향을 전달했고, 여자부 7구단 체제를 유지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흐름이었다. 이후 2026년 6월 2일 KOVO 이사회와 임시 총회에서 SOOP의 신규 회원 가입이 승인되면서 후보 단계는 끝났다. 페퍼저축은행 배구단은 SOOP으로 넘어가 재창단 수순을 밟게 됐다.
숫자로 보면 이 대목이 꽤 흥미롭다. 신생팀 수준의 가입비가 약 20억 원 안팎으로 거론됐지만, 최종적으로는 신규 회원 회비 2억 원과 특별 발전기금 3억 원, 총 5억 원 규모로 알려졌다. 리그 입장에서는 7개 팀 체제를 지키는 것이 더 급했다. 여자부가 6개 팀으로 줄면 일정, 흥행, 중계 편성, 선수 수급까지 연쇄적으로 흔들린다. 한 팀의 생존이 곧 리그 구조의 안정성 문제였던 셈이다.
기록으로 보면 페퍼는 ‘버려진 팀’이 아니었다
솔직히 페퍼를 단순히 실패한 구단으로만 보면 맥락을 놓친다. 성적은 낮았지만, 창단팀이 겪는 성장통도 분명했다. 승수는 3승에서 5승, 다시 11승, 15승 흐름으로 올라갔다. 2025-26시즌 후반의 반등은 조이 웨더링턴의 공격력, 시마무라 하루요의 중앙 보강, 기존 국내 선수들의 경험치 축적이 겹치면서 나왔다. 완성형 전력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숫자는 팀이 경쟁 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 창단: 2021년, 여자부 7구단으로 합류
- 초기 성적: 첫 시즌 3승 28패
- 최악의 기록: 2023-24시즌 23연패
- 반등 신호: 2025-26시즌 창단 첫 최하위 탈출
- 인수 이후 방향: SOOP 수퍼스로 재창단, 2026-27시즌 참가
여기서 팬들이 민감하게 반응한 부분은 선수단 승계였다. 인수가 무산됐다면 선수들은 2차 드래프트 등으로 흩어질 수 있었다. 팀 스포츠에서 이건 단순한 고용 문제가 아니다. 세터와 공격수의 호흡, 리베로의 수비 범위, 미들블로커와 블로킹 시스템 같은 것들이 전부 다시 쪼개진다는 뜻이다. SOOP 인수로 최소한 선수단의 뼈대가 유지됐다는 건 경기력 측면에서도 의미가 컸다.
SOOP 수퍼스가 풀어야 할 진짜 과제
SOOP은 자회사 SOOPTV를 통해 구단 운영을 맡고, 이민원 대표가 구단주, 이병호 전무가 단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초대 감독은 김세진 감독으로 정해졌다. 구단명은 SOOP 수퍼스, 연고지는 2026년 7월 30일 전남광주로 확정됐고 엠블럼도 공개됐다. 겉으로 보면 행정 절차는 빠르게 채워졌다.
그런데 코트 안의 문제는 이제부터다. 2026-27시즌 선수 등록 흐름을 보면 SOOP은 1차 등록 12명, 추가 등록 후 14명 규모로 출발했다. 여자부 구단별 보수 총액 상한은 샐러리캡 21억 원과 옵션캡 6억 원을 합친 27억 원이다. SOOP의 국내 선수단 총액은 그 상한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으로 알려졌고, 이는 두 가지로 읽힌다. 비용 구조는 가볍지만, 상위권 팀들과 붙을 즉시 전력 보강 여지도 크다는 뜻이다.
특히 외국인 선수와 아시아쿼터 구성이 중요하다. 페퍼가 반등할 때도 공격 효율과 중앙 높이 보강이 결정적이었다. 김세진 감독 체제에서 세터진을 어떻게 안정시키고, 고예림·하혜진·한다혜 같은 베테랑 자원을 어떤 역할로 묶느냐가 초반 승점 싸움을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 신생 재창단팀이라고 해도 V리그 일정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1라운드에서 연패가 길어지면 팬덤의 기대감은 금방 불안으로 바뀐다.
팬덤과 플랫폼의 만남은 실험이다
SOOP 인수를 보는 재미는 여기에 있다. 기존 대기업 스포츠단 모델과 다르게, SOOP은 중계와 실시간 소통을 사업의 중심에 둔 회사다. 경기 전후 콘텐츠, 선수 인터뷰, 훈련장 비하인드, 팬 커뮤니티 운영을 구단 운영과 직접 연결할 수 있다. 물론 콘텐츠를 많이 만든다고 승점이 자동으로 쌓이진 않는다. 하지만 하위권 팀일수록 팬이 팀의 성장 과정을 계속 따라갈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광주 기반을 유지한 것도 가볍게 볼 장면이 아니다. 지역 팬들은 팀이 약해도 경기장을 채우고, 선수 이름을 기억하고, 연패 중에도 다음 홈경기를 기다린다. SOOP 수퍼스가 이 감정을 플랫폼 감각으로 잘 이어 붙인다면, 단순히 해체 위기를 넘긴 팀을 넘어 여자배구의 팬 경험을 바꾸는 사례가 될 수 있다.
내가 이 인수를 흥미롭게 보는 이유도 그 지점이다. 페퍼는 성적표만으로는 오래 아팠던 팀이지만, 사라지기 직전에 가장 또렷한 반등 숫자를 남겼다. SOOP은 그 숫자를 이어받았다. 이제 필요한 건 멋진 출범식보다 첫 시즌의 버티는 힘이다. 7구단 체제를 지킨 선택이 몇 년 뒤 여자배구의 좋은 분기점으로 기억되려면, SOOP 수퍼스는 팬들이 납득할 만한 경기력과 꾸준한 운영을 동시에 보여줘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