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기록표를 파고들어봤더니 1초보다 더 큰 흐름이 보였다

얼마 전 런던 마라톤 기록표를 다시 보다가 숫자 하나에서 한참 멈췄습니다. 1시간 59분 30초. 마라톤이 드디어 공식 기록에서도 두 시간 벽을 깼다는 건 단순히 빠른 선수가 한 명 나왔다는 이야기가 아니더군요. 42.195km를 1km당 약 2분 50초 안쪽으로 밀고 간다는 뜻이고, 5km를 대략 14분 10초대 흐름으로 여덟 번 넘게 반복했다는 뜻입니다. 솔직히 이 정도면 기록이라기보다 종목의 기준선이 이동한 사건에 가깝습니다.
기록은 숫자인데, 흐름은 세대 교체다
2026년 4월 런던에서 사바스티안 사웨가 1시간 59분 30초를 찍으면서 남자 마라톤 공식 세계 최고 기록의 문법이 바뀌었습니다. 켈빈 킵툼이 2023년 시카고에서 세운 2시간 00분 35초도 당시에는 거의 비현실적인 기록처럼 보였는데, 그보다 65초가 더 줄었습니다. 마라톤에서 65초는 작지 않습니다. 엘리트 레벨에서는 5km 구간 하나에서 몇 초만 밀려도 레이스의 색깔이 바뀌니까요.
재미있는 건 이 기록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엘리우드 킵초게의 2시간 01분 09초, 킵툼의 2시간 00분 35초, 그리고 사웨의 1시간 59분 30초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면 남자 마라톤은 2시간이라는 상징을 향해 단계적으로 압축돼 왔습니다. 예전에는 2시간 03분대만 나와도 역사적인 레이스였는데, 이제는 2시간 02분대가 우승 보증수표가 아닌 시대가 됐습니다.
페이스로 보면 더 무섭다
마라톤 기록을 볼 때 완주 시간만 보면 감이 조금 덜 옵니다. 그래서 페이스로 쪼개 보면 체감이 확 살아납니다. 2시간 00분은 1km 평균 2분 50초 6 정도입니다. 사웨의 1시간 59분 30초는 그보다 더 빠른 2분 49초대 후반 흐름입니다. 일반 러너가 1km 전력 질주로도 버거워하는 속도를 풀코스 내내 붙잡고 간 셈입니다.
- 2시간 05분: 1km 약 2분 58초
- 2시간 03분: 1km 약 2분 55초
- 2시간 01분: 1km 약 2분 52초
- 1시간 59분 30초: 1km 약 2분 50초 미만
근데 여기서 중요한 건 단순 속도보다 유지력입니다. 30km 이후에도 리듬이 무너지지 않는 선수들이 기록표 상단을 차지합니다. 마라톤은 초반 25km까지 빠르게 달리는 종목이 아니라, 빠른 상태로 버틴 뒤 마지막 10km에서 손실을 최소화하는 종목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세계 기록급 레이스는 후반 페이스가 무너지지 않는 순간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여자 마라톤도 이미 다른 층으로 올라섰다
여자부 기록의 변화도 만만치 않습니다. 루스 체픈게티치는 2024년 시카고에서 2시간 09분 56초를 기록했습니다. 여자 마라톤이 2시간 10분 안쪽으로 들어간 장면은 기록표를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티그스트 아세파가 2023년 베를린에서 2시간 11분 53초를 만들었을 때만 해도 한동안 버틸 기록처럼 느껴졌는데, 1년 만에 2분 가까이 당겨졌습니다.
그리고 2026년 바르셀로나에서 포티엔 테스파이가 2시간 10분 51초를 기록하며 2시간 10분대 초반의 두께를 만들었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한 명의 돌출 기록은 때때로 예외처럼 보일 수 있지만, 바로 뒤를 잇는 선수가 등장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기록은 개인의 폭발이지만, 기록대가 두꺼워지는 건 종목 전체의 진화입니다.
왜 이렇게 빨라졌을까
사실 마라톤 기록 향상을 선수 재능 하나로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훈련 방식, 보급 전략, 신발 기술, 코스 선택, 페이스메이커 운영이 함께 맞물립니다. 특히 베를린, 런던, 시카고, 발렌시아 같은 코스는 기록을 노리는 선수들에게 중요한 무대가 됐습니다. 평탄한 코스, 안정적인 기온, 촘촘한 페이스 그룹이 갖춰지면 선수는 초반부터 불확실성을 줄이고 자기 리듬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신발 이야기도 빼기 어렵습니다. 카본 플레이트와 고반발 폼이 등장한 뒤 장거리 기록의 기준은 분명히 바뀌었습니다. 다만 모든 걸 신발 탓으로 돌리면 선수들의 훈련과 레이스 운영을 너무 가볍게 보는 셈입니다. 좋은 장비는 손실을 줄여주지만, 35km 이후에도 몸을 앞으로 보내는 건 결국 선수의 엔진입니다. 장비가 문을 열었고, 선수들이 그 문을 아주 과감하게 밀고 들어갔다고 보는 쪽이 더 맞습니다.
기록표에서 봐야 할 건 1위만이 아니다
마라톤 기록을 볼 때 1위 기록만 보면 절반만 본 겁니다. 남자부는 2시간 02분대와 2시간 03분대 기록자가 계속 쌓이고 있고, 여자부도 2시간 14분 안팎이 더 이상 먼 세계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예전의 세계 기록급 시간이 이제는 우승 경쟁권의 기준이 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이 변화가 가장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라톤 기록을 볼 때 단순히 ‘누가 가장 빨랐나’보다 ‘몇 명이 그 기록대에 들어왔나’를 더 자주 봅니다. 기록의 천장이 올라가는 것도 대단하지만, 바닥이 함께 올라갈 때 종목은 진짜로 바뀝니다. 세계육상연맹 기록표 기준으로 보면 2020년대 중반 마라톤은 바로 그 구간에 들어와 있습니다. 한 명의 천재가 만든 장면을 넘어, 여러 선수가 비슷한 속도로 같은 벽을 두드리는 시대입니다.
앞으로 더 빠른 기록이 나올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다만 저는 이제 1분 단축보다 그 기록이 어떤 레이스에서, 어떤 페이스 분포로, 누구와의 경쟁 속에서 나왔는지를 더 보고 싶습니다. 마라톤 기록은 숫자로 남지만, 그 숫자를 만든 42.195km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선수의 선택과 시대의 변화가 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기록표는 차갑지만, 오래 들여다볼수록 꽤 뜨겁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