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러셀을 기록으로 다시 봤더니, 서브왕의 시즌은 꽤 복잡했다

얼마 전 2025-26 V-리그 기록표를 다시 펼쳐봤는데, 대한항공 러셀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숫자보다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서브 라인 뒤에서 공을 몇 번 튕기고, 큰 보폭으로 들어와 때리는 그 한 방. 상대 리시브 라인이 먼저 움찔하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러셀의 대한항공 시절은 단순히 강한 외국인 공격수가 잘했다, 혹은 후반에 부진했다 정도로 끝낼 이야기가 아니다.
러셀은 2024-25시즌 막판 요스바니의 부상 공백 속에 대체 외국인 선수로 합류했고, 2025-26시즌에는 본격적으로 대한항공의 주전 아포짓 역할을 맡았다. 대한항공은 원래 한선수의 빠른 배분, 정지석과 정한용의 사이드 균형, 김규민과 김민재의 중앙 활용이 살아야 강한 팀이다. 그런 팀에 러셀이 들어왔다는 건 단순히 득점 기계 하나를 꽂은 게 아니라, 서브와 높은 볼 처리라는 확실한 무기를 더했다는 뜻이었다.
대체 카드에서 1위 팀의 축으로
처음 대한항공 러셀을 볼 때 흥미로웠던 건 역할의 선명함이었다. 그는 팀 공격을 전부 독점하는 유형이라기보다, 필요할 때 길게 올라온 볼을 끝내고 서브 한 턴으로 흐름을 뒤집는 선수에 가까웠다. 대한항공처럼 시스템 배구를 중시하는 팀에서는 외국인 선수가 너무 튀어도 밸런스가 흔들리고, 반대로 존재감이 약하면 승부처 화력이 부족해진다. 러셀은 적어도 시즌 중반까지 그 중간선을 꽤 잘 탔다.
실제로 한국배구연맹 발표 지표를 보면 러셀의 2라운드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공격 성공률 56.40%로 해당 라운드 1위, 세트당 서브 0.826개로 역시 1위, 득점은 150점으로 상위권이었다. 기자단 투표에서도 34표 중 19표를 받아 남자부 2라운드 MVP에 올랐다. 이 시기의 대한항공은 9연승까지 치고 나갔고, 러셀의 서브 턴은 상대가 세트 초반부터 신경 써야 하는 별도 과제가 됐다.
숫자로 보면 더 선명한 서브의 값
러셀의 시즌을 숫자로 놓고 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역시 서브다. 2025-26 정규리그에서 러셀은 35경기 673득점을 기록했고, 공격종합 성공률 50.78%를 남겼다. 둘 다 리그 6위 수준의 생산성이었다. 그런데 세트당 서브 득점은 0.551개로 남자부 1위였다. 이 수치는 단순히 에이스가 많았다는 뜻에서 끝나지 않는다. 러셀의 서브는 상대 세터의 선택지를 줄이고, 대한항공 블로킹 라인이 미리 자리를 잡을 시간을 벌어줬다.
- 정규리그 35경기 673득점으로 긴 시즌 내내 주 득점원 역할을 맡았다.
- 공격종합 성공률 50.78%를 기록하며 많은 볼 점유 속에서도 50%대를 지켰다.
- 세트당 서브 득점 0.551개로 남자부 1위에 올랐다.
- 2라운드에는 공격, 서브, 득점이 동시에 폭발하며 라운드 MVP를 받았다.
서브가 좋은 선수는 많지만, 러셀의 서브는 체감 압박이 달랐다. 2025년 11월 25일 KB손해보험전에서는 25득점, 공격 성공률 60.71%, 후위 공격 8득점, 블로킹 5득점, 서브 3득점으로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다. 특히 세트 중반 크게 밀리던 흐름에서 러셀의 서브가 연속 득점의 출발점이 됐다는 점이 컸다. 점수판에는 서브 에이스 1개로 찍혀도, 리시브가 흔들려 넘어온 찬스를 다시 따내면 그 역시 러셀의 지분이다.
좋았던 경기와 불안했던 흐름
12월 4일 우리카드전도 러셀의 장점이 잘 드러난 경기였다. 그는 26득점, 공격 성공률 59.38%, 서브 에이스 5개, 후위 공격 10개를 기록했다. 대한항공은 1세트를 내주고도 3-1로 뒤집었고, 그 승리로 10승 1패, 승점 28까지 올라섰다. 이쯤 되면 러셀은 단순한 보강 선수가 아니라 정규리그 1위 경쟁의 실제 엔진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배구는 길다. 특히 V-리그 남자부는 외국인 아포짓에게 주는 부담이 꽤 크다. 시즌 중반 이후 정지석, 임재영 등 사이드 자원의 몸 상태가 흔들리자 대한항공은 러셀을 아웃사이드 히터 쪽으로 돌리고 임동혁을 아포짓에 세우는 실험도 했다. 공격력만 놓고 보면 매력적인 배치였지만, 러셀에게 리시브 부담이 얹히는 순간 장점과 약점이 동시에 드러났다. 강서브와 높은 타점은 여전히 무서웠지만, 공수 밸런스가 흔들리면 대한항공 특유의 촘촘한 운영도 함께 무뎌졌다.
러셀의 강점은 확실했고, 약점도 숨기기 어려웠다
러셀을 볼 때 냉정하게 봐야 할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경기 하나를 서브로 찢어놓을 수 있는 선수다. 하지만 챔피언결정전 같은 단기전에서는 리시브, 수비 연결, 공격 효율의 지속성이 더 까다롭게 검증된다. 대한항공은 결국 2026년 3월 20일 챔피언결정전을 앞두고 호세 마쏘를 영입했다. 러셀 입장에서는 잔인한 타이밍이었고, 팀 입장에서는 우승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한 승부수였다.
교체 이후에도 지워지지 않은 이름
흥미로운 건 러셀이 팀을 떠난 뒤에도 그의 값어치가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한항공은 마쏘와 함께 현대캐피탈을 상대로 챔피언결정전 5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정상에 올랐고, 컵대회 우승과 정규리그 1위, 챔프전 우승까지 가져갔다. 러셀은 마지막 코트 위에는 없었지만, 정규리그 1위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분명히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 부분을 빼면 그 시즌의 대한항공 이야기는 어딘가 비어 보인다.
그리고 2026년 5월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에서 러셀은 전체 1순위로 OK저축은행의 선택을 받았다. 방출 뒤 두 달 만에 다시 V-리그 시장의 맨 앞에 선 셈이다. 이 장면이 꽤 상징적이다. 팀은 단기전 판단으로 그를 바꿨지만, 리그 전체는 여전히 러셀의 서브와 높이, 경험을 크게 평가했다. 스포츠에서 한 팀의 선택이 선수의 전체 가치를 곧바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걸 보여준 사례다.
내가 기억하는 대한항공 러셀
내게 대한항공 러셀은 실패한 외국인 선수도, 완벽한 우승 조각도 아니다. 정규리그라는 긴 항로를 밀어 올린 강력한 엔진이었고, 봄배구 문턱에서 팀의 계산과 엇갈린 선수였다. 숫자는 꽤 선명하다. 673득점, 공격종합 50.78%, 서브 1위, 2라운드 MVP. 그런데 그 숫자 옆에는 9연승의 열기, 후반기 기복, 챔프전 직전 교체, 그리고 다시 1순위로 돌아온 장면까지 붙어 있다.
그래서 대한항공 러셀의 진짜 이야기는 좋았다거나 아쉬웠다는 한쪽 감정으로만 담기 어렵다. 그는 대한항공을 우승권에 올려놓는 데 힘을 보탰고, 동시에 대한항공이 더 높은 확률을 찾아 움직이게 만든 선수였다. 팬 입장에서는 조금 씁쓸하지만, 이런 복잡함 때문에 기록을 다시 보게 된다. 숫자는 냉정한데, 그 숫자 옆에는 늘 사람이 남는다.
